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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호남의 선비(2) 대쪽 같은 선비, 금남 최부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기사입력  2020/01/13 [09:58] ⓒ IBN일등방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iBN일등방송=박용구 선임기자 기자】조선의 청백리가 몇 명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전고대방>에는 218명, <청선고>에는 186명이 선발되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청백리가 아니지만 조선에는 청렴한 선비가 여럿 있었다. 최부와 박순 등이 그들이다.

 
금남 최부(1454~1504). 그는 나주에서 태어나 해남정씨와 결혼하여 처가인 해남에서도 살았다. 그의 호 금남(錦南)도 나주의 옛 이름인 금성의 금(錦)과 해남의 남(南)을 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그는 사림의 종주(宗主)인 점필재 김종직(1431~1492) 문하에서 공부한 청렴하고 강직한 선비였다.


그의 청렴성은 지지당 송흠(1459~1547)과의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허균의 아버지인 초당 허엽(1517~1580)이 <전언왕행록>에서 전하기를 성종 말년에 최부와 송흠은 홍문관에서 같이 일하고 있었다. 고향도 둘 다 전라도라, 두 사람은 가깝게 지내는 터였는데, 같은 시기에 휴가를 받아 고향에 갔다. 휴가 중에 영광 삼계(지금은 장성군)에 사는 송흠이 나주에 있는 최부의 집을 찾아갔다.


점심 겸상을 물린 뒤 최부가 송흠에게 느닷없이 무슨 말을 타고 왔느냐고 물었다. 송흠은 역마를 타고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최부는 역마는 한양에서 고향집에 올 때까지만 탈 수 있는데 어찌 사사로운 일에 쓰느냐고 질책을 하였다.

 
휴가가 끝나고 홍문관에 출근하자마자 최부는 송흠을 탄핵하였다. 그리하여 송흠은 파직을 당했다. 파직 당한 날 송흠은 최부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최부는 “자네는 아직 나이가 젊네.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일세”라며 타일렀다. 송흠은 이런 공직 초기의 실수를 교훈 삼아 신독(愼獨)하여 일곱 번이나 청백리에 선발되었다.


이처럼 최부는 너무나 대쪽 같은 선비였다. 사리사욕과 방탕, 그리고 무사안일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 강직한 간관(諫官)이었다. 그는 훈구대신과 임금의 종실과 외척, 그리고 후궁과 환관들의 타락을 신랄하게 공박하였고, 심지어 임금의 잘못까지도 낱낱이 거론하였다.


한번은 폭군 연산군에게 ‘학문을 게을리 하고 오락을 즐기며 국왕이 바로 서 있지 않다’고 상소하였다. 연산군 3년(1497년) 3월, 사간원 사간(종3품)인 그가 올린 상소는 너무나 격렬하여 다음 달에 최부가 중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갈 때 연산군은 관례를 깨고 사간의 직책을 회수하여 버렸다.


다음 해(1498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사관 김일손(1464~1498)이 성종실록 편찬을 위한 사초(史草)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적은 것을 이유로 일어난 사화에 김종직의 제자이면서 연산군 눈 밖에 난 최부가 무사할 리 없었다. 최부는 붕당을 하였다는 이유로 곤장 80대를 맞고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를 갔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504년에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최부는 또 끌려왔다. 곤장 100대에 노비가 되어 거제도로 유배 가는 것으로 되었으나, 연산군은 그리하지 않았다. 참형(斬刑)을 명한 것이다. 이 때 썼을 시가 전해진다.


북풍이 다시 세차게 부는데                  北風吹更急  
남녘 길은 어찌 이렇게 멀까.                南國路何長 
매화는 차갑게 잔설을 이고                  梅冷封殘雪 
말라버린 연꽃 가지 작은 못 속에 있네.   荷枯立小塘

 
1504년 10월 25일자 ‘연산군일기’에는 최부의 졸기(卒記)가 이렇게 적혀 있다.
“최부는 공정하고 청렴하며 정직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역사에 능통하여 문사(文詞)가 풍부했고,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아는 바를 말하지 아니함이 없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첨단 산월초등학교 근처에 무양서원(武陽書院)이 있다. 여기에 최부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그의 외손자 미암 유희춘(1513~1577)도 함께 배향되어 있는데 ‘미암일기’의 저자이기도 한 유희춘은 외할아버지 최부의 글을 모아 ‘금남집’을 엮었고 선조 2년(1569년)에 다시 간행된 ‘표해록(漂海錄)’의 발문을 썼다.


한편, 1488년에 최부가 지은 ‘표해록’은 당나라 때 유학 온 일본승려 에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원나라 때 지어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함께 중국 3대 해양 여행기로 유명하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표해록’은 번역본이 여러 권인데, 최부에 대한 평전(評傳)이 아직도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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