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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호남의 선비(5) 도학과 문장과 절의의 선비, 하서 김인후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기사입력  2020/02/03 [10:17] ⓒ IBN일등방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근래 소인(小人)으로서 죽어도 죄가 남을 자는 다 복직되고, 한때 잘못한 일은 있더라도 그 본심은 나라를 속이지 않은 자는 상은(上恩)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상은을 입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 사람들이 숭상하던 글도 모두 폐기하고 쓰지 않으니, 매우 온편하지 못합니다.”


1543년 7월 20일 부수찬(종6품) 김인후(1510~1560)는 경연에서 중종 임금에게 기묘사림들의 복권 문제를 거론한다.


이날 중종은 승지 홍섬에게 다시 묻는다.


중종 : “김인후가 아뢴 전말을 잘 듣지 못하였는데, 과연 누구를 가리킨 것인가?”
홍섬 : “신도 미처 잘 듣지 못하였으므로 사관(史官)에게 물으니, 본심이 나라를 속이지 않았다는 것은 기묘년 사람(조광조·김식·김정·기준·윤자임·한충 등)을 가리킨 것이라 합니다.”


7월 22일 경연에서 김인후는 이틀 전에 한 이야기를 중종에게 다시 자세하게 아뢰었다.


“전에 조강(朝講)에서 신의 말소리가 작아서 분명히 아뢰지 못하였으므로 지극히 황공합니다. 기묘년 사람은 한때 한 일이 죄다 옳지는 못하나, 그 본심은 터럭만큼도 나라를 속인 것이 없는데도 마침내 무거운 죄를 입었습니다. 그 뒤에 죄지은 사람 중에는 대역부도(大逆不道)하여 죽어도 죄가 남을 자라도 세월이 오래되어 혹 복직(復職)된 자가 있는데, 기묘년 사람은 오히려 상은(上恩)을 입지 못하니, 신은 홀로 온편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뿐이 아니라, 그들이 한때 숭상하던 '소학', '향약(鄕約)'의 글도 모두 폐기하고 쓰지 않습니다.”(중략)


중종이 이르기를, “저들이 마음을 쓴 것이 그르지 않다 할지라도 장차 나라를 그르치는 일이 있을 것이므로, 조정이 그 폐단을 바로 잡으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소학', '향약'을 사람 때문에 폐기할 수는 없다”하였다.(후략)


이날 경연에서 이언적도 나서서 기묘사림의 복권을 주장하며 김인후를 도왔으나, 중종은 화가 난 표정이었다. 직급도 낮은 신하가 자기가 내친 조광조 등을 다시 복권하라 건의했으니 아무리 이치에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임금으로서는 못마땅한 일이었으리라.


이 일이 있은 후 1543년 12월에 김인후는 노부모 봉양을 이유로 전라도 옥과현감으로 내려간다.

 
김인후는 22살(1531년)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퇴계 이황과 교분이 두터웠고, 154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고 다음 해에 호당에 뽑혀 이황, 나세찬, 임형수 등과 사가독서(유능한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는 일)의 영광을 누렸다.


하서 김인후는 시강원 설서(정7품)가 되어 인종(1515~1545)을 가까이 모셨다. 세자 인종은 하서를 극진히 사랑하여 묵죽도를 그려주고 새로 간행된 '주자대전'을 주었으며 술도 같이 마셨다. 하서는 인종이 그린 묵죽도에 시를 적었다.


“뿌리와 가지, 마디와 잎새가 이리 정미(精微) 하니
바위를 친구 삼은 정갈한 뜻이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비로소 성스런 혼이 조화를 기다리심을 보았나이다.
온 천지가 어찌 어김이 있겠습니까.”


1544년 11월에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였다. 김인후는 인종을 곁에서 모시면서 지키고자 하였다. 그는 문정왕후가 임금의 약 처방까지 한다는 데 불안해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의원의 처방에 동참하겠다고 청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효종은 ‘역(逆)이지만 충(忠)’이라고 하였다. 계모 문정왕후를 의심한 것은 역이지만 인종을 위하여 한 행동은 충이라는 의미이다.


1545년 7월 1일 30세의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했다. 야사에는 문정왕후가 준 떡을 먹고 죽었다고 적혀있다. 일종의 독살설이다.


다행히 인종은 죽기 이틀 전인 6월 29일에 조광조, 김식, 김정, 기준 등을 복권하고 현량과를 다시 설치하라는 교지를 내린다.


명종이 즉위하자 하서 김인후는 옥과현감을 끝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낙향한 하서는 인종이 너무나 그리웠다. 이에 ‘그리운 사람(有所思)’이란 시가 전해진다. 

 
“임의 나이는 서른이 되어 가고
내 나이는 서른여섯이 되는데
새 즐거움 반도 못 누렸건만
한 번의 이별은 활줄 떠난 활 같네.(중략)


묻혀 살면서 봄가을이 몇 번이던가.
오늘까지 아직도 죽지 못했소.(후략)”


하서는 인종의 기일인 매년 7월 1일에 장성 백화정 앞의 난산에서 종일토록 통곡하였다. 제자인 송강 정철이 그 모습을 시로 남기었는데, 그 편액이 필암서원에 있다.


동방에는 출처 잘 한 이 없더니
홀로 담재옹(김인후의 다른 호)만 그러하였네.
해마다 칠월이라 그날이 되면
통곡소리 온 산에 가득하였네.


김인후는 문묘 18현 중 유일한 호남의 선비이다. 장성군 필암서원과 황룡면 맥동마을의 백화정, 난산, 어사리, 그리고 묘소 등지에는 하서 선생의 혼이 진하게 배어 있다./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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