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 이야기 >
의로운 호남의 선비(6) 임억령, 의(義)를 위해 형제간 인연도 끊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기사입력  2020/02/10 [17:38] ⓒ IBN일등방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한강수야 잘 있거라.                            好在漢江水
평온하게 흘러서 파도를 일으키지 말라.   安流莫起波


1545년 7월 인종이 승하하고 11살의 명종이 즉위하자,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친동생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린다.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 일파를 제거하라는 것이다. 이 때 윤원형의 오른팔인 이조판서 임백령(?~1546)은 형 임억령(1496~1568)에게 을사사화 참여를 권유한다. 임백령의 동생 임구령은 이미 을사사화에 앞 장 선 터였다.


임억령은 아우 백령에게 피바람을 일으키지 말라고 타이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임억령은 한강까지 전송 나온 백령에게 위 시를 지어준다. 괜스레 죄 없는 선비들을 죽이고 귀양 보내는 일을 하지 말라는 충고이다.


임억령은 해남군 동문 밖 해리에서 태어났다. 석천(石川)이란 호도 그가 태어난 마을의 개울 이름이다. 그의 형제는 오형제였는데 이름은 천령, 만령, 억령, 백령, 구령이었다.


임억령은 14세에 눌재 박상(1474~1530)의 제자가 된다. 이때 동생 백령도 같이 공부하였는데 박상은 억령에게는 장자를 읽으라고 하면서 ‘너는 문장이 될 것’이라고 하였고, 백령에게는 논어를 공부하라고 하면서 ‘족히 나랏일을 담당할 것’이라 하였다.


석천은 벼슬에 별 뜻이 없었다. 30살이 된 1525년에야 과거에 급제한 후,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며, 1544년에는 동부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반면에 임백령은 1519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이조 참판, 호조판서 등을 거쳐 을사사화 당시에는 이조판서였다. 야사에 의하면 임백령은 윤임이 그의 정인(情人) 옥매향을 소실로 삼은 것에 분노를 느껴 을사사화 때 윤임에게 복수를 했다 한다.


1546년 5월에 임억령은 동생 백령의 추천에 의해 원종(原從) 공신의 녹권(錄卷)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산골 외진 곳에 가서 제문을 짓고 녹권을 불사르며 시를 읊었다.


대나무가 늙었으니 베어 쓰이는 것 피하였고 
소나무는 고상하여 벼슬을 받지 않는다.     
누가 송죽과 같이 지조를 같이 할꼬         
깊은 골짜기에 머리 흰 늙은이로다

     
이 시에는 형제간의 우애도 끊고자 하는 임억령의 절의가 잘 나타나 있다.


1545년 11월 7일의 『명종실록』에는 “금산군수 임억령이 신병으로 사직원을 내니 윤허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 사관은 “임억령은 사람됨이 소탈하여 얽매인 데가 없었으며, 또 영화와 이익을 좋아하지 않았다. 동생과 함께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쾌히 멀리 떠나 병을 칭탁하고 오지 않았으니 그의 동생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평하고 있다.


그러면 출세한 임백령은 어떠했을까. 우의정으로 승진한 임백령은 1546년 6월에 사은사로 중국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병으로 죽는다.


한편, 전라도로 낙향한 임억령은 해남, 창평, 강진에 별장을 두고 자연 강산을 즐기며 산수 유람을 한다. 또한 스승인 눌재 박상의 유고문집도 발간한다.

 
몇 년 후에 그는 다시 벼슬에 나아가 1554년에는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고, 62세인 1557년에 담양부사를 하였다. 3년 후에 그는 사직하고 담양 성산 아래 식영정(息影亭)에서 자연을 벗 삼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낸다. 식영정은 그의 사위 김성원이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담양 식영정 마루에는 석천이 지은 '식영정기' 편액이 걸려 있다. 석천의 글은 장자의 기품이 가득하고, 은둔과 순리의 자연론이 담겨있다.

  
“김군 강숙(剛叔 김성원의 자)이 정자 이름을 지어 주기를 나에게 청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장자의 말을 들은 일이 있는가? 장자가 말하기를, 옛날에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죽을힘을 다하여 달아났다. 그런데 그 그림자는 사람이 빨리 달아나면 빨리 쫓아오고, 천천히 달아나면 천천히 쫓아와서 끝끝내 뒤만 쫓아다니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너무나 다급한 김에 나무 그늘 아래로 달아났더니 그림자가 문득 사라져서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후략)”


석천은 3,000수나 되는 시를 남긴 시문의 종주였다. 시 솜씨는 이백을 닮았고 만년에는 두보의 시법을 터득하였으며 문장은 장자의 『남화경』을 근본으로 하였다. 그는 세속에 얽매임이 없는 도인(道人)이었다.


눈은 도를 사색하느라 감았고
머리는 세속을 싫어해 숙였도다.
스스로 장주(莊周)의 학문을 체득하니
영광과 괴로움이 하나로 여겨지네.


석천의 신위는 해남 해촌서원과 화순 도원서원에 배향되어 있다./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광고
트위터 페이스북 공감 카카오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IBN일등방송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포토> 봄기운 성큼, 꽃망울 터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주간베스트 TOP10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