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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개와 겸양의 사림 재상, 박순(1)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기사입력  2019/11/22 [13:26] ⓒ IBN일등방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 용아 박용철(1904~1938) 시인 생가 뒤에는 송호영당이 있다. 이곳에는 기묘명현 눌재 박상(朴祥 1474~1530)과 사림재상 사암 박순(朴淳 1523~1589)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박순 영정은 후덕하고 차분한 모습이다. 절제된 기품이 배어있다. 박순은 절개와 겸양의 사림 재상이다. 선조 시절에 정승만 내리 14년을 하였고, 영의정에 있던 기간이 7년이었다.

박순의 자(字)는 화숙(和叔), 호(號)는 사암(思庵)이다. 아버지는 개성유수와 전주부윤을 한 육봉 박우(1476~1547)이고, 큰 아버지는 청백리를 두 번이나 한 기묘명현 눌재 박상이다.

박순의 할아버지 박지흥은 세조가 조카 단종의 임금 자리를 찬탈하고 목숨까지 빼앗자 충청도 회덕에서 살다가 광주로 은거했다.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사동마을은 박지흥의 처가 계성서씨(桂城徐氏) 마을 근처였다.

박우는 분가하여 부인 당악김씨의 향리인 나주 공산에 기거하였고, 1523년 10월에 나주에서 박순이 태어났다. 그런데 박순이 6세 되던 1528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광주 서모의 집에 맡겨져 자랐다.

박순은 18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송도 3절 중 하나인 화담 서경덕(1489~1546)에게 수학하였다. 박순과 같이 공부한 사람은 초당 허엽(1517~1580), 토정 이지함(1517~1578) 등이다.

1546년에 서경덕이 돌아가셨다. 1547년에는 부친 박우가 별세하자 박순은 삼년간 시묘를 살았다.

박순은 절개 있고 강직한 선비였다. 나이 31세인 1553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촉망받는 관료가 된 후에도 조용히 지냈다. 이렇듯 수기(修己)를 한 박순은 의외로 빨리 이름을 알렸다.

1556년에 박순은 중국 사행 길에 들여오는 밀수품을 단속하는 수은어사가 되었다. 박순은 중국과의 접경지역인 압록강 변 의주에서 밀수품을 단속했는데, 밀수품이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1501~1565) 소생인 의혜공주의 물품인줄 알면서도 가차 없이 압수해 버렸다. 대부분의 어사들이 왕실과 권신의 위세에 눌려 직무를 소홀히 하던 상황에서 박순은 살아있는 권력에 칼을 댄 것이다.

1561년 박순은 홍문관 응교 시절인 1545년 을사사화의 주역 임백령(1498~1546) 시호 사건으로 시련을 겪는다. 1546년에 우찬성 임백령이 명나라 사은사로 갔다가 귀국 도중에 갑자기 병사(病死)하자 이를 슬퍼한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이 임백령에게 시호를 내리도록 명종을 부추긴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임백령의 시호를 지으려 하지 않았다. 높은 시호를 올리면 권세에 아첨하는 것으로 보이고, 그렇지 않으면 윤원형의 미움을 사게 될 것이므로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박순이 나섰다. 임백령이 큰 아버지 박상의 제자라는 인연을 생각하여 그는 소공(昭恭)이라는 시호를 지어 올렸다.

‘이미 과오가 있으나 고칠 수 있다’는 소(昭)와 '모습과 거동이 공손하고 아름답다.’라는 공(恭)을 쓴 것이다. 이에 윤원형은 격분했다. 명종을 보위에 오르게 한 일등공신에게 문(文)이나 충(忠) 시호를 올리지 않다니. 1545년 을사년 일을 과오로 보는 사람이 있다니. 이 사건으로 박순은 1561년 5월 관직을 삭탈당하고 나주로 귀향했다.

박순이 삭탈관직 되자 퇴계 이황(1501~1570)과 기대승(1527~1572)도 애석해 하였다. 이황과 기대승이 1558년부터 13년간 주고받은 편지에 나온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동정이 많아서였을까. 박순은 삭탈 된 지 7개월 후인 1561년 12월에 한산군수에 임명되었다.

1565년 4월, 20년간 권력을 농단한 문정왕후가 별세하였다. 그녀는 ‘조선의 측천무후’라 불릴 정도로 나라를 주물렀다.

정국은 요동쳤다. 조정 대신들 사이에는 20년간 지속된 문정왕후의 세도가 그대로 유지될 지가 초미의 관심이었다. 그런데 대사간 박순이 세도가 척결에 앞장섰다. 5월에 문정왕후가 병조판서로 임명한 승려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 보내더니, 8월초에는 대사헌 이탁을 설득하여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 합동으로 윤원형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늘을 찌르던 권력자 윤원형을 탄핵한 박순의 용기는 참으로 대단했다. '세도를 만회하는 일은 나의 책임이다. 이제 죽을 자리에 왔다'라는 각오로 탄핵했다.

하지만 윤원형은 한 번의 상소로 물러나지 않았다. 박순은 첫 번째 상소 11일 만에 다시 상소를 올렸다. 이번에는 윤원형의 부정과 비리를 26가지나 상세하게 열거하면서 탄핵하였다.

이러자 명종도 어찌할 수 없었다. 명종은 외삼촌 윤원형을 파직시키고 유배를 보냈다. 마침내 명종비의 인척 심통원 등 외척들마저 물러났고 사림들이 정치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박순은 사림의 리더가 되었다.(계속됩니다.)/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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