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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개와 겸양의 사림 재상, 박순(2)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기사입력  2019/12/02 [10:24] ⓒ IBN일등방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박순은 겸양(謙讓)의 선비였다. 1567년에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박순은 1568년에 홍문관·예문관 대제학에 임명되고 이황은 제학이 되었다. 이황을 스승처럼 모시는 박순이 그냥 있을 리 없었다. 이황이 대제학이 되어야 한다고 자기 자리를 바꾸어 줄 것을 청했다.

졸지에 대제학이 된 이황은 이를 끝까지 사양하고 직임을 받지 않았다. 이황은 정유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박화숙(박순의 자)이 대제학을 맡고 있으면서 나를 추대하고 자신은 사양하여 마침내 이 관직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늙고 병들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내가 감히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으리오.”라고 적었다.

사암 박순이 퇴계 이황에게 대제학 자리를 양보한 것은 겸양의 극치로 남아 있다. 영조 시절의 실학자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 ‘인사문’에서 사암능양(思庵能讓 박순이 겸양에 능하다)이란 제목으로 이 일을 기록하여 박순을 칭송하고 사리사욕에만 급급했던 당시 세태를 한탄하였다.

“우리 선조 조정에 퇴계 선생이 예문관 제학에 임명되자, 당시 대제학 박순이, ‘신(臣)이 대제학인데 퇴계 선생은 제학이니, 나이 높은 큰 선비를 낮은 지위에 두고 초학자가 도리어 무거운 자리를 차지하여, 사람 쓰는 것이 뒤바꿔졌습니다. 청컨대 그 임무를 교체해 주옵소서.’하였다. 임금께서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니, 모두 박순의 말이 당연하다 하므로 이에 박순과 이황의 벼슬을 바꿀 것을 명령했으니, 아름다워라! 박순의 그 훌륭함이여. 세속의 모범이 될 만하다. 오늘날 이욕만 챙길 뿐 이를 보고 본받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랴? 아! 슬픈 일이다.”

한편, 퇴계 이황(1501~1570)은 늙고 병이 듬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안동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런데 선조가 놓아주지를 않았다.

마침내 이황은 1569년(선조 2년) 3월 4일 밤에 선조를 면담하고 사직 허락을 받았다. 선조는 마지못하여 퇴계의 낙향을 허락하면서 조정 신하 중에서 학문하는 이를 한 사람 추천하라고 한다. 퇴계는 처음에는 추천을 안 하다가 선조가 세 번까지 묻자 고봉 기대승(1527~1572)을 추천하였다.

“기대승(奇大升)이 문자(文字)를 많이 보았고 이학(理學)에도 조예가 가장 높으니 통유(通儒)입니다. 다만 그는 수렴공부(收斂工夫)가 부족한 것이 미진한 점인데 소신이 평상시에 이 점을 부족하게 여겨서 좀 더 공부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자(儒者)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선조실록 1569년 3월 4일자)

퇴계가 영남의 직계 제자들을 젖혀두고 고봉을 선조에게 추천한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퇴계는 고봉을 성리학에 가장 밝은 후학으로 평가했다.

3월 5일에 퇴계는 서울을 떠난다. 이 날 기대승, 박순, 이담 등이 퇴계를 동호(東湖)에서 전송하여 강가의 농막에서 유숙하였고, 봉은사까지 따라가 송별했다.

고봉 기대승은 동호의 배 위에서 이별시를 퇴계에게 드린다.
넘실넘실 밤낮으로 흐르는 한강수야               漢江滔滔日夜流
떠나시는 우리 선생 네가 좀 말려다오             先生此去若爲留
강변에서 닻줄 끌고 이리저리 배회할 제          沙邊拽纜遲徊處
떠나심에 애 간장 가득 찬 이 시름을 어이하리.  不盡離腸萬斛愁

박순도 시를 지었다.
끊임없는 고향생각 고리처럼 이어지시더니        鄕心未斷若連環
한 필 말로 오늘에야 도성문을 나서셨구려         一騎今朝出漢關    
추위에 묶여 매화가 봄인데도 안 피었으니         塞勒嶺梅春未放
꽃을 아껴 늙은 신선 돌아오길 기다린 것이리.    留花應待老仙還

이어서 여러 사람들이 증별시를 지었다.
퇴계 이황은 일일이 화답하지 못하고 기대승과 박순의 시에 화답하는 차운 시를 지어 전별 나온 이들에게 읊는다.

아래는 기대승에 화답한 시이다.
배 위에 앉아 있는 인물들 참으로 명류 名流이니    列坐方舟盡勝流
돌아가고픈 마음 하루 종일토록 매어있네.            歸心終日爲牽留
이 한강수 떠다가 벼룻물로 써서                        願將漢水添行硯
끝없는 작별 시름 베껴 보려네.                         寫出臨分無限愁

다음은 박순에 화답한 시이다.
물러감 윤허하시니 쫓겨남과 어이 같으리            許退寧同賜쾌環
어진 분들이 내 고향 가는 길 전송하시네             群賢相送指鄕關
부끄러워라 네 임금(四聖)의 후한 성은 입고서      自慙四聖垂恩眷
부질없이 일곱 번이나 왔다 떠났다 했구나.          空作區區七往還

그런데 안동으로 내려간 이황은 도산서당에서 머물다가 1570년 12월 8일에 별세하였다. 박순은 만시를 쓰고 이황의 묘비명을 지었다. 하지만 박순의 묘비명은 그 사연이 정확하지 못하여  이황 문중에서 채택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황 문중과 제자들은 고봉 기대승에게 묘비명을 맡기지 말라는 퇴계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고봉에게 묘비명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안동의 퇴계 묘소에 있는 기대승이 쓴 묘비가 있다.(<퇴계집> 언행록 5 유편(類編) 고종기(考終記) 참조)/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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